⟪선잠 Seonjam⟫ 전시 서문, 김리아갤러리, 2025

사일런트 듀엣
Silent Duet






“전화가 계속해서 울린다. 마침내 손이 수화기를 들 때, 전화는 계속 울린다.”¹


1930년대 뉴욕의 한 아편굴 깊숙한 곳에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아편굴에는 한 남자가 미동도 없이 누워있다. 지속되는 벨소리에도 그는 응답하지 않는다. 화면은 비 오는 길가의 가로등으로, 재난 현장을 수습하는 경찰들의 모습으로, 금주법 시대의 끝을 축하하는 광경으로 서서히, 그러나 갑작스럽게 전환된다. 와중에 벨소리는 꾸준히 이어져 관객을 신경질이 날 정도에 이르게 한다. 전화벨이 스무 번쯤 울렸을 때, 결국 어떤 손이 등장해 수화기를 든다. (그럼에도) 전화는 계속 울린다.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1984) 도입부의 이 기념비적인 장면에 대해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첫 번째 소리는 “현실”에 속한다. 반면에 수화기를 든 이후에도 계속되는 전화벨 소리는 지정되지 않은 실재의 공백에서 나온다.”² 영화의 벨소리는 이처럼 오로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가 아니다. 그것은—자그마치 3분이나 이어지는 이 미칠듯한 벨소리는—아편의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깨워 현실의 필연성을 깨우치게 한다. 아편의 환상, 그러니까 꿈으로부터 깨어나 현실로 넘어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꿈이 현실보다 더 실재적이고, 더 외상적이고, 더 충격적인 경우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해당한다. 그러나 환상으로부터 도피한 현실에서 우리가 다시 마주할 일들을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깨어남은 계속해서 꿈꾸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즉 우리는 실재적인 악몽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더 큰 실재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김영현은 그간 “상징적 허구들의 근본적인 역설”³을 통해 자신의 작업 안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정면으로 다뤄왔다. 그에게 상징적 질서란 익히 알려진 바대로 언어의 세계, 실재의 혼돈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현실을 지배하는 힘인 동시에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론적 관성의 일종으로서 아무런 의심 없이 현실에 접근하려는 주체의 순진한 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의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서사나 현상에 관해 작가는 이들이 사후적으로 정립되었다는 사실을 주시하며, 비록 그 또한 사후적일지라도 정립의 과정에서 자신이 상실한 것을 자각하고자 분투한다. 이를 위해 그가 채택한 전략은 현실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수단으로서 허구적 환영을 창조하고 그 환영을 스스로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함정은 환영이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데 있다. 따라서 환영의 깨어짐은 현실의 붕괴를 동반하며, 이러한 동반적 붕괴를 통해 허구와 현실의 불가분성을 제시하는 일이 김영현의 작업에서는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

같은 맥락에서 2021년에서 2023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회화는 상징화에 대한 전념, 그리고 그 전념이 실패에 이르는 지점에서 실재를 역으로 드러내는 일에 열중했다. 초원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말, 붉은색 곱슬머리를 한 천사들의 군상, 붉은 말 위에 엎드린 흰 날개의 천사 등 작가는 특정 도상을 화면 위에 등장시켰는데, 이는 주로 종교화, 신화화, 역사화를 통틀어 중요하고도 복합적인 상징으로 기능해 온 것들이었다. 이처럼 미술사적으로 고착화된 의미는, 불분명할지언정 각 작품이 어떠한 서사를 함축하고 있으리라는 기대, 심지어 작품과 작품을 연속적으로 매개하는 논리구조가 존재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작가는 서사가 있는 듯한 연출에 서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되물으며, 자신이 주로 활용하는 종교적, 신화적 도상들의 궁극적 무정형성을 폭로했다. “결코 보이지 않는 살이며, 사물들의 토대”⁴인 무정형성은 회화를 자세히 보아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서투른 원근처리와 왜곡된 신체비율, 묘사된 인물들의 인형 같고도 기계적으로 조립된 듯한 표정과 자세를 통해 의도적으로 유출되었다. 마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표현법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본 적 없는 대상을 마치 본 것처럼 그리는 행위와 무엇인가를 믿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발명하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다.⁵

김영현의 회화에서 2024년부터 두드러지는 변화는 크게 두 가지로, 추상으로의 전환과 물리적 지지체에 관한 실험을 들 수 있다. 먼저 관념적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관념적 대상을 관념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로 일부 전환되는데, 이는 기존에 대상에게 부여되던 자의적인 서사마저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그림의 확대된 일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검고 흰 덩어리나 자연에 내재한 피보나치의 수열을 연상시키는 유기적 패턴들은 그 자체로는 여전히 하나의 상징이지만 더 이상 사물을 대체하는 언어로서 기능할 수 없으므로, 의미에 의해 채워질 수 없는 틈새를 열어젖힌다. 한편, 이 시기부터 작가는 그림이 스며든 광목의 실을 풀거나, 이를 판넬로부터 분리해 길게 늘어뜨리고 구김을 주는 등 지지체의 연약함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했다. 프레임을 벗어난 천은 상징적 질서의 내부로 포섭될 수 없는 과잉된 기표이자 실재적인 것을 추방하여 성취된 회화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으로서, 궁극적으로는 해당 개념의 환영적 지위를 환기시키는 장치가 된다.  

전시 ≪선잠≫에서 김영현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지적 실험과 회화적 실험을 토대로 초감각적이고 본체론적인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환영을 겨냥한다. 재현의 커튼 뒤에 은폐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현실의 실체가 도리어 은폐적 제스처로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작가의 회화를 촉진하는 동력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커튼을 걷으려고 하기보다 커튼을 이중으로 설치하는 방식을 통해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음’의 상태를 조성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쯤 열린 창문의 틈새를 통해 실재를 자각하게 만드는 정도의 회화가 아닌, 그 전부가 환영이자 현실이며 환영과 현실이 서로를 공격하는 회화를 구축한다. 전시와 동명인 <선잠>(2025)을 비롯해 <두 사람>(2025), <세 개의 발>(2025), <창백한 허물>(2025) 등의 작업에 등장하는 낯익은, 그러나 작가의 상상으로 꾸며낸 존재자들은 안전한 거리에서 관찰되는 현실과 이미 근접해있는 실재 사이의 긴장을 형상화하듯 불안정한 구도와 기이한 디테일을 특징으로 삼는다. 관객을 이들을 시각적으로 식별해 낼 수 있으나, 그래서 결국 이들이 무엇인지는 쉽게 정의내리지 못한다. 한편, <무희>(2025), <더미>(2025), <3-1>과 <4-1>(2025) 같이 최소화된 조형적 얼개로 인해 모호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은 실재에 과도하게 밀착함으로서 오히려 현실성(reality) 자체가 사라진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적 풍경을 예시한다. 이처럼 김영현은 자신의 회화를 통해 직관적 대상의 보유 여부가 현실과 환영을 가르는 경계가 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화면 안에는 그려짐으로 인해 현실화된 대상이 징후로서 기입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판단을 넘어선 공허한 말이며 모든 서사를 농담화하는 한낱 형식, 우연을 가장한 필연성의 외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서술들을 모두 포함하는 적대적 실재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벨소리가 있다. 이 벨소리는 환상과 현실이 구분 불가능함을 밝히고 둘을 하나로 잇는 청각적 텍스처로서 기능한다. 반면 김영현의 회화에는 벨소리와 같은 외적 개입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존재했더라면 이는 프레임 밖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굴절하여 안으로 수렴했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회화에는 스스로를 영원히 외래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각적 모티프 및 이들의 연결과 반향이 있다. 우리가 이를 신비주의의 한 양상이라고 확신할 때쯤, 회화는 자신의 신체-장막에 상처를 내어 그것이 연출된 환영임을 물질의 궁극적 근거로서 반박한다. 따라서 작가가 여태 보지 못한 이미지들과 한 번도 표현된 적 없는 심상을 그린다고 할 때, 이는 그러한 존재들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형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들을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다. 그러나 이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믿음을 필수적으로 포함하고 있기에, 작가는 기꺼이 속기 위해 그리기로 한다. 가까운 미래에 자신이 믿고 있는 모든 진실의 정체가 드러나기를 바라면서.

여기서 또 다른 질문. 과연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의 한 형태가 우리가 매일 꾸는 악몽이라면, 믿지 않는 것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¹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옮김(서울: 도서출판 b, 2023), 203.
² 같은 곳.
³ 같은 문단에서 뒤이어 설명하듯, 상징적 허구들의 근본적인 역설이란 허구가 현실의 상실을 초래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에 대한 유일한 접근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같은 책, 176.
⁴   The ego in Freud’s Theory and in the Technique of Psychoanalysis,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2, ed. Mill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159, 같은 책, 229에서 재인용.
⁵   공교롭게도 지젝은 2025년 1월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의 죽음을 추모하며, 그의 영화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로 깊이감의 상실을 지적한다. 극도로 사실적인 재현이 중시되는 시대에 다소 시대착오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원근법적 표현의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지젝은 라파엘 전파로부터 그 기원을 찾는다. 김영현의 작업은 동시대 회화에 속하지만, 구도와 색채, 모티프를 포함한 많은 부분에서 고전주의 회화의 영향 아래 놓여있다. 그것이 단순한 참조점인지 아니면 진정한 회귀를 목적으로 삼는지는 다투어볼 여지가 있지만, 이로 인해 하나의 화폭 내에서 이질적 시간성이 발생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Slavoj Žižek, “David Lynch as a Pre-Raphaelite”, e-flux notes  (January 2025), accessed July 9, 2025, https://www.e-flux.com/notes/650324/david-lynch-as-a-pre-raphaelite.






임현영